200713 중부 프랑스 오베르뉴론 알프유슨(Uson)

200713 중부 프랑스 오베르뉴론 알프유슨(Uson)유 성(Usson)은 오ー우에루뉴-론-알프(Auvergne-Rhone-Alpes)지역, 푸-도-돔(Puy de D̂ me)현, 리브라도우아-포레 스 지역 자연 공원(le Parc NaturelRégional du Livradois-Forez)속에 위치한 마을이다.화산의 분화로 생긴 바위 언덕 위에 서서 개미에 타니(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용암이 식어 파이프 오르간의 형태로 굳어진 6각주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사면을 곳 곳에 걸었다.이 시꺼먼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서 만든 중세 시대의 건물은 오렌지 색 기와 지붕으로 덮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해발 639미터 높이의 유성의 바위산(le puy d’Usson)의 정상에는 높이 7m의 성모상을 싣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채 서있다.성모 마리아 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 지표가 되고 있다.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및 몬 돔(Monts D̂ me또는 Châne des Puys)등 오ー우에루뉴 화산 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도우아-포 래즈(Livradois-Forez)지대로 떠나고 퍼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사실 이 자리에는 먼저 방문한 마을 노네트(Nonette)처럼, 요새성이 서있었다.20의 탑과 삼중 성벽으로 구성된 중세 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그러나 노네트 성과 마찬가지로 중앙 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밀려, 지금은 폐허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흔적만 남아 있다.폭파된 성의 일부의 잔재가 언덕 여기저기 나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로 덮인 채 방치되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대로 지나간 것 같다.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라는 별명으로 불린 마그리트·도·바루 가(Marguerite de Valois, 1553-1615)이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한 곳이다.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과 왕비 캐서린·도·메디시스(Catherine de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갖춘 공주였다.16세기 종교 전쟁의 한복판으로 구교와 신교도로 갈라진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 결혼으로 수습하려고 구교 측 캬토링도·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개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헹리케(Henrike, 1553-1610)왕자에 시집 보내다.구교와 신교도의 화해를 상징해야 하는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 없는 구교 세력이 개신교 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 사태로 변질된다.우여곡절(생략)끝에 헨리가 왕자는 나중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으로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 전쟁의 종결을 이끈다.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집 사이에서 일시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측에서는 개신교의 집에 시집이라고 꺼리게 되고, 개신교 진영에서는 천주교의 집 출신이라고 싫어한다.더구나 왕위 계승과 관련하고, 연줄이 없고, 형인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 눈이 붙어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인이나 장미의 왕인 헹리케에도 버려지는 판이다.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포함된다.이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소스는 따로 있을 다름 아닌 뱀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마고 여왕은 역시 갇혀서 보내고 자신의 인생을 글로 회고했다.그녀의 사후에 출판된 이 회고록은 근친 상간, 불륜 등 그녀의 은밀한 고백을 담고 있으며 출판 당시 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다.동시에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 전쟁의 전개 사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료와 생각된다.유성의 돌담길을 끼고 걷다 보면 곳 곳에서 하늘색의 널과 조우하게 되지만 이 판자는 마고 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글을 담고 있다.유성 성이나 뱀 여왕이나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 깊으므로, 이제 와서 사라진 성이 왠지 안타깝게 느껴진다.중앙 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은 심하다.그런데 마고 여왕인 유성으로 하나 이삼 십일 홍제 행 무상이라니…이래봬도영원한 것은 없다.남아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그러나 성이 없는 유성도 충분히 매력적이다.드문 자연 경관과 조화된 돌의 집집마다 사람의 왕래도 적고 이 3일, Puy de D̂ me지방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 여행지로 손색이 없었다.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제목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유성(Usson)은 오베르뉴-롱-알프(Auvergne-Rhone-Alpes) 지역, 푸-드-돔(Puy de D̂me)현, 리브라두아-포레스 지역 자연공원(le Parc Naturel Régional du Livradois-Forez)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바위 언덕 위에 서서 아리에 계곡(vald’Allier)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파이프 오르간 모양으로 굳어진 6각기둥형 현무암군이 바위 언덕의 경사면을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다. 이 거무스름한 현무암 오르간(orgues basaltiques)을 이용해 만든 중세시대 건물은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해발 639m 높이의 유성 바위산(lepuyd’Uson) 정상에는 7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얹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 한 채 서 있다. 성모 마리아상은 19세기 말에 세워진 이래 비행사들에게 지표가 되고 있다. 이 언덕 위에서 몽돌(Monts Dore) 및 몽돔(Monts D̂me 또는 Chânedes Puys) 등 오베르뉴 화산지대의 풍경과 리브라두아-포레즈(Livradois-Forez) 지대를 향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자리에는 앞서 방문한 마을 노넷(Nonette)과 마찬가지로 요새성이 서 있었다. 20개의 탑과 3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중세시대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넷성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를 관철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밀려나 지금은 폐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폭파된 성의 일부 잔재들이 언덕 곳곳에 나뒹굴고 있지만 지금은 이끼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어 설명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쳐간 듯하다. 한편 이 성은 마고 여왕(La Reine Marg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가 1586년부터 1605년까지 19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마고 여왕은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2세(Henri II)와 왕비 캐서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막내딸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공주였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한복판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뉜 왕족 및 귀족 가문 간의 분쟁을 정략결혼으로 수습하고자 구교 진영의 캐트린드 메디시스는 마그리트 공주를 신교 진영을 대표한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Henrike, 1553-1610)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상징해야 할 이들의 결혼식은 터무니없이 구교세력이 신교세력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유혈사태로 변질된다. 우여곡절 끝에 헨리케 왕자는 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Henri IV)가 되어 낭트 칙령을 발표(1598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한편 마고 여왕은 가톨릭인의 친정과 개신교인의 시댁 사이에서 한때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구교 진영에서는 신교 집안에 시집갔다는 미움을 받고, 신교 진영에서는 구교 집안 출신이라고 미움을 받는다. 게다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연줄이 없어 형이자 프랑스의 왕인 앙리 3세에게 눈독을 들이고 불임, 불륜, 정치적 변절로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인 헨리케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이 캔버스 필름 등 다양한 매체에 담긴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대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소스는 따로 있기에 다름 아닌 마고 여왕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마고 여왕은 역시 그 자리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삶을 글로 회고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이 회고록은 근친상간, 불륜 등 그녀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외교, 사회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개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로 여겨진다. 유선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하늘색 판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판자는 마고여왕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문장을 담고 있다. 유성성이라든가 마고여왕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왔는데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이제야 사라진 성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중앙집권화도 좋지만 리슐리외(삼총사에 나오는 악덕 추기경)는 심하다. 그런데 마고여왕이든 유선이든 화무십일홍제행무상이라니······ 영원한 것은 없다.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나 죽으면 끝. 하지만 성이 없는 유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귀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돌집마다 인적도 드물어 지난 3일간 Puy de D̂me 지방으로의 여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좀처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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